살롱(Salon).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이 단어를 헤어살롱, 네일아트살롱 등등 '뷰티산업'과 관련지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살롱의 본래 의미도 '뷰티(Beauty)'와 관련이 있을까요?
살롱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크게 4가지의 뜻이 나옵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는 의미는 마지막에 가장 가까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번 아트딕셔너리에서 다루고자 하는 살롱은 바로 3번 '미술 단체의 정기 전람회'입니다. 살롱이 전람회를 뜻하는 말이었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살롱 카레에서 열린 최고의 전람회
르브루 궁과 르브루 박물관 (Palais du Louvre & Le musée du Louvre)
매년 수많은 방문객이 다녀가는 루브르 박물관, 이 루브르 박물관은 루브르 궁전의 내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루브르 궁은 1725년 프랑스 최고의 전람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전람회의 이름은 개최되었던 장소, 루브르 궁전의 ‘살롱 카레(Salon Carr, 정방형의 방’의 이름을 따 '살롱(le Salon)'이라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살롱전은 점점 발전하며, 1737부터는 미술 발표 기관으로서의 그 기능을 확립하게 됩니다. 운영 기관이나 정책 등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왕족, 귀족 등 소수의 사람들만 관람이 가능했던 것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살롱전은 19세기 중엽까지 미술가들과 시민을 맺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자, 근대적인 미술비평을 발전시킨 온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루브르 궁 '살롱 카레'에서 열리는 살롱전을 묘사한 그림 루잔 프르제파르스키K. Lucjan Przepiorski, <루브르의 살롱 카레 Le Salon Carre du Louvre>, 1875
창립 이후부터 어마어마한 인파를 동원, 전시 작품에 대한 열렬한 경탄과 함께 수많은 화제를 낳았던 전람회였기에, 화가에게 살롱전이란 꿈이자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살롱전에서 수상을 하는 화가들의 경우, 최고의 부와 명예를 보장받았다고 합니다. 심사제도가 존재했다는 것 외에 독특한 점이 있다면, 오늘날과 달리 살롱에서는 사람의 눈높이에서부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꼭대기까지, 벽면 가득 그림을 걸었다는 점인데요, 이 때문에 화가들은 되도록 자신의 작품이 잘 보이는 곳에 걸릴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살롱 그리고 아카데미즘의 한계와 문제점
프랑스 최고의 전람회, 살롱. 하지만 살롱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이상적인 전람회는 아니었습니다. 17~19세기 우리가 아는 유명한 화가들, 모네, 마티스, 고흐 등은 오히려 살롱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당대 유명 화가들이 살롱을 거부한 이유는 몇가지 한계와 문제점들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살롱의 탄생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17~18세기 왕실 미술의 예시 (좌)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성모승천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649-50 (우) 로렌스 알마 타데마 Lawrence Alma Tadema, <클라우디우스 황제 선포 Proclaiming Claudius Emperor>, 1867
최초의 살롱은 1664년 프랑스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Beaux-Arts, 이후 아카데미)의 설립과 함께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아카데미란 미술에 관한 행정과 교육을 독점하고, 미술학교와 공식적인 전람회 등을 지배하고자 루이 14세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때문에 살롱과 아카데미는 미술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정치적인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고대의 전쟁 영웅이나 신화 속 인물들, 기독교 성인들이 등장하는 고귀한 역사화들이 프랑스의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 화가들에게 많은 역사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살롱이 가장 번창했던 시기의 군주였던 루이 16세는 계몽주의 시대의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선전하고 왕실을 개혁하고자, 신고전주의 미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군주들의 이러한 모습은 아카데미 미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회화의 주제에 따른 장르별 서열을 엄격하게 설정하기에 이르렀는데요, 최고 서열은 역사화(혹은 종교화)였고, 초상화, 장르화, 정물화와 풍경화가 순서대로 그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와 그 산하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업을 받는 모습들 (좌) 요한 조파니 Johann zoffany, <왕실 아카데미의 학자들 the academicians of the royal academy>, 1771-2 (우) 알버트 마레 Albert Marquet, <에콜데보자르의 누드화 수업 Life Class at the École des Beaux-Arts (Fauvist Nude)>, 1898
이와 더불어 살롱 초기에는 아카데미 회원들 혹은 에콜 데 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 아카데미 산하의 미술학교)의 졸업생 정도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심사위원 역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진이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때문에 살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화를 잘 그려야 했으며, 출품되는 작품의 대부분 역시 역사화 이거나 종교화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살롱의 관료적인 아카데미즘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외면함으로써 미술 발전을 방해한다는 비난을 사기 시작합니다. 살롱전 역시 그러한 비난의 일부를 수용하여, 1863년에는 유명한 〈낙선자전(Salon des Refusés, 살롱 데 르퓌제)〉을 개최했고, 1883년에는 출품자 중에서 뽑힌 90명이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개편했지만, 이러한 개혁에도 만족하지 못한 진보파들이 1884년, 무감사제를 내세운 ‘살롱 데 앙데팡당’이라는 또 다른 살롱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릅니다.
또 다른 살롱전, <살롱 데 앙데팡당>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을 선호하던 국가와 살롱의 아카데미즘적 특성은 나폴레옹 3세가 재임 중이었던 19세기 말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화가들은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키워갔고 이것이 극에 달해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1863년 살롱 심사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모아, 〈낙선자전(Salon des Refusés, 살롱 데 르퓌제)〉을 열게 됩니다.
마네 Edouard Manet, <풀밭 위의 점심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바로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Le Déjeuner sur l'herbe)>. 귀족 차림의 남자와 벌거벗은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앞에서는 고상한 척을 하지만 뒤에서는 매춘을 즐기던 당대 귀족들의 현실을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전시회를 문전성시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비난을 받았고, 이 작품을 전시한 낙선전 또한 1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마네의 주변에는 젊은 화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요, 그들 중에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인상주의 화가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서로 예술적인 영감들을 주고받았는데요, 이후 그들은 '독립예술가협회(Socit des Artistes Indpendants)'를 창설, 1884년 무심사를 간판으로 내걸고, <살롱 데 앙데팡당 (독립화가전, Salon des Indépendants) 이하 앙데팡당>를 개최합니다.
살롱 데 앙데방당의 실제 모습 (출처 : gallica.bnf.fr)
파리의 한 가건물에서 처음 열린 이 전시회에는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 폴 시냐크(Paul Signac)·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등이 주도하였고, 앙리 루소(Henri Rousseau) · 폴 세잔(Paul Czanne)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등의 화가들이 참여하였고, 제7회 전시부터는 모네(Claude Monet),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드가(Edgar Degas)와 같은 인상주의 회가들 또한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앙데팡당 전에 소개됐던 작품들 (좌) 조르주 쇠라 Georges-Pierre Seurat, <아스니에르의 수욕 Bathers at Asnieres>, 1883-84 (우) 앙리마티스 Henri Matisse, <사치,평온,쾌락 Calme et Volupté>, 1904
이처럼 앙데팡당전에는 기존의 살롱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보적이고 새로운 화가들이 대거 참여하며, 대중들과 미술비평가들에게는 논란과 이슈의 중심지로써, 또 화가들에게는 새로운 등용문으로써, 19세기 말 새로운 미술의 포문을 여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는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1903), <살롱 데 튈르리>(1923), <살롱 드 메>(1941) 등 앙데팡당과는 또 다른 전시들이 출현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을 넘어 미국까지 이어져 제2, 제3의 살롱전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롱은 살롱이다
보수적인 성향 탓에, 결국 19세기 <살롱 데 앙데팡당>을 비롯한 다른 전시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살롱전. 그런데 어째서 이후에 등장한 전시들에도 '살롱'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있는 것일까요?
살롱전에 등장 이전 살롱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앞서 살펴본 의미들 중, 1번 2번에 해당하는 '객실이나 응접실, 혹은 상류 가정의 객실에서 열리는 사교적인 집회' 이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살롱 전이 등장하면서 '살롱'이라는 기존 단어에 '전람회 (혹은 전시회)'라는 의미가 생긴 것이죠. 다시 말해, 전시회의 이름이 곧 하나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가브리엘 자크 드 생 토뱅 Gabriel Jacques de Saint-Aubin, <1779년의 살롱 The Salon of 1779>, 18C
이렇듯 17세기 처음 등장한 살롱전은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의 미술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술계를 넘어서 문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파장과 영향력을 발휘한 전시회가 과연 이 세상에 또 나타날 수 있을까요? 그런 전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살롱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최고의 전람회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